Blooming

2023 Solo Exhibition



'피어난다'는 의미가 있는 전시 <Blooming>은 잠재된 시각이 피어나는 때를 연구하며 제작한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에게 '잠재성'은 시선이 도달해야 할 영역이자 회화적 언어로 가시화해야 하는 과제이다. 빛, 그림자, 가려진 대상은 잠재성을 지닌 소재로 작품의 화면에 등장한다. 특정한 소재가 반복적으로 화면에 등장했던 과거의(2012-2021) 작품들부터 최근(2022-2023)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그 안에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존재에 대한 사유가 담겨있다.


시선이 멈추던 장면을 촬영하거나 기록하는 과정에서는 대상과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그리고 대상을 다시 들여다보면서 당시에는 깨닫지 못한, 새로운 지각적 경험을 한다. 일상의 순간마다 시선이 멈추던 대상에는 잠재된 영역을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10월의 어느 날, 사람들 틈으로 시선을 둔 곳에는, 마치 꽃처럼 빛이 피어 만개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어머니의 안경은 일정을 마친 어머니와 그 안경을 쓰고 있던 어머니의 시간들이 모두 있다. 흔적을 마주하는 순간에는 다른 시공간에 있는 존재와의 만남이 피어난다.



이영은, 2023년 3월 28일 수정




2021 Solo Exhibition 'Ways of Seeing'



여섯 번째 개인전 ‘Ways of Seeing’은 작업의 변화와 함께 작가의 태도의 변화를 보여주는 전시로, <Image>라는 제목의 신작들로 구성된다. ‘image’는 사전적으로 구체적인 형태가 있는 형상 또는, 형태가 없는 인상이나 심상을 지칭하는 말이다. 과거 작품에서 몸이 빠져나간 듯한 옷의 형상은, 내가 경험할 수도, 볼 수도 없는, 타인의 세계에 대한 낯설음이자 나에게로 한정된 ‘앎’과의 간극에서 오는 감정이 투영된 형상이다. 익숙한 사물에서 출발한 이 형상은 낯선 흔적이 되었고 한 명 한 명의 사람을 암시하는 기호로 화면에 제시되었으며 점차 클로즈업 되거나 경계가 흐려지면서 모호한 이미지로 변화해갔다. 이 모호함은 2021년의 작품에서는 ‘가변성’을 동반하게 되었다.


익숙한 대상이 이미 가지고 있는 조형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접근 방식을 통해 도출된 작품 <Image>(2021)는 누군가에게는 얼음 결정으로, 누군가에게는 왕관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우주선으로, 또는 이미지의 근원을 알 수 없는 조형물이나 추상적인 인상으로 남게 된다. 대상의 형태와 화면에 부여된 색채는 임의의 형상을 떠올리는 통로가 되고 그 통로를 따라 떠올린 형상은 내가 알고 있는 것, 보았던 것, 경험한 것에 따라 고정되지 않은 인상을 남기면서 시선에 가변성을 부여한다.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따라,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는 이 과정은 세계를 알아가고 경험하는 모습과 닮아 있다. 이것은 ‘(타인을)알 수 없음’을 강조하던 과거 작업에서 ‘(타인을 포함한 대상을)알아가는 과정’으로 초점이 이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계획 없이 사물을 조합하거나 다각도에서 바라보며 예상치 못한 조형미를 발견했을 때 이것을 화면에 옮기는 제작 방식에도 대상을 새롭게 알아가는 태도가 내포되어 있다. 사물의 규모와 조합, 바라보는 거리와 각도에 따라 새롭고 모호한 형상을 발견하는 것은 무엇인가로 확정되고 결정되지 않은 대상이 그것을 마주하는 사람들의 인식 안에서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이미지로 재발견되기를 지향하는 태도에서 발생한 접근법이다.


이영은, 2021년 7월

STATEMENT / 이영은

남겨진 것에서 사라진 것을 발견하는 회화 작업


길을 걷다 스쳐 지나간 그 사람은 집에 가서 무엇을 할까. 어떤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서 어떤 생각으로 휴식을 취할까. 하루를 되뇌며 감상에 젖어있을까. 좀 더 빨리 들어오지 못한 것에 짜증을 내며 추레한 옷차림으로 쭈그려 앉아 드라마를 볼까.

그 사람은 지친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라와 열쇠로 문을 열고, 아끼는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놓고, 반갑게 맞이하는 가족들에게 의례적으로 인사하며 방으로 직행한다. 이어서, 색깔도 맞지 않는 티셔츠와 바지를 아무렇게나 걸쳐 입고는 거울을 한 번 보면서 ‘남들은 집에서 내가 이러고 있는걸 상상도 못 할거야’ 라고 생각한다. 다음날 아침, 늘어난 티셔츠를 벗고 결혼식에 가기 위해 옷장을 뒤적인다.


위의 글에서 타인처럼 지칭한 ‘그 사람’은 타인에 의해 관찰된 ‘나’일수도 있다. ‘나’ 또한 모두의 타인이며 ‘타인’은 모두 각각의 나이다. 우리는 사적인 공간에서만 지낼 수는 없기에 외부와 소통하기 위한 모습을 만들어간다. 공간과 환경은 하나의 매뉴얼이 되어 ‘나’를 다룬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최소한의 자아를 지키면서도 공개해도 괜찮을 만한 어떠한 ‘표시’를 한다. 그 표시는 누군가 에게는 내면의 단서를 제공하기도하고, 나를 방어해주기도하며, 행동을 규제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경계로 하여 외부로 표시한 한정적인 모습만을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다. 모든 타인은 각각 한 명의 ‘나’로 이 세계를 살아가며 남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독립된 사생활과 사유를 지니고 있다. 때문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의 흔적을 발견하거나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들으면 흐릿하게나마 그의 존재가 나와 같음을 인지하게 된다.


공공의 장소에서 발견하는 낯선 사람들 틈에서 타인의 존재여부에 대한 궁금증을 가졌다. 시야에서 벗어난 세계는 실존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며 동시에 그 안을 맴돌던 사람들의 존재가 더욱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런 기분은 친밀한 관계의 지인들과 대화를 나누던 순간에도 불현듯 찾아오곤 한다. 상대가 지금 이 순간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매 순간 내리꽂는 시선의 범위는 어디까지 인지 짐작은 하지만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느끼는 것과 같을 수는 없다.  이러한 사유로 인해 내면과 외면의 매개물의 역할로 ‘사물’이 화면에 등장했으며 옷이나 소품 등의 사물을 통해 ‘사물 너머의 존재’를 이야기 하기로 했다. 어떤 공간 안에 남겨진 사물(또는 흔적)은 물질적 특성을 넘어 누군가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그림에서 사물은 누군가의 정보나 시간을 담고 있는 ‘흔적’으로 나타나고 보고 있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연결하는 매개물이 된다. 횡단보도에 떨어져 있는 장갑 한 짝, 그것은 어떤 사람이 그 자리를 지나가고 있던 상황을 담고 있는 증거이자 취향과 성격 그 이상을 상상하게 하는 단서이기도 하다. 주체가 사라진 사물의 단서는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보여지는 것들에서 추출할 수 있는 사회적, 역사적, 주관적 정보들을 분석하여 주체를 상상하고 판단하는 것뿐이다. 공공의 장소나 사람의 시야에서 머물고 떠나간 자리에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시선에 사라진 주체로, 남겨진 흔적으로 다시 머물게 된다.


결국 흔적은 ‘누군가의 자화상’이다. 몸이 빠져나간 듯한 옷 더미의 이미지는 사람을 그리지 않았지만 사람을 이야기 하고 있다. 화면 속에서 몸이 부재한 군복더미, 양복더미 등은 오히려 부재한 몸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하며 사회적 위치 너머의 개인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보이는 것 너머에도 존재하는 삶이 있음을 지극히 시각적인 사물의 표피를 통해 더욱 깊게 생각하게 하는 것에 가치를 두고 사물과 공간, 시간 속의 존재에 대해 회화적으로 풀어내어 드러낸 화면 앞에서 감상자는 자신의 모습, 또는 경험을 투영시키며 작품 속 ‘사라진 몸'의 주인공이 된다.


타인과의 삶, 타인의 삶


출근길, 또 퇴근길. 오늘 내가 오고 가는 길에는 그 길을 공유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있다. 내가 밟은 계단을 누군가가 뒤이어 밟고 올라오고 버스를 기다리던 내 옆에 누군가 와서 함께 기다리고 버스가 오면 그 사람은 홀로 남아 또 누군가와 그 자리를 공유하고…... 우리는 상당히 규칙적으로, 많은 시간을 낯선 누군가와 공존한다. 말 한번 섞지 않고 그저 몇 번의 눈길을 보내며 짧게는 몇 초, 길게는 한 두 시간의 순간을 타인들과 함께한다. 그렇게 반복되는 낯선 공존의 시간에서 작가는 타인의 존재여부에 대한 궁금증을 가진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던 그 사람이 내 시야에서 벗어난 순간 흐릿해져 사라질 것만 같다. 소멸이나 실종이 아니다. 내 눈과 내 공간에서 벗어난 세계는 실존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며 동시에 그 안을 맴돌던 사람들의 존재가 더욱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런 기분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던 순간에도 불현듯 찾아오곤 한다. 상대가 지금 이 순간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매 순간 내리꽂는 시선의 범위는 어디까지 인지 짐작은 하지만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느끼는 것과 같이 타인에게 동감할 수는 없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몸을 경계로 하여 외부로 표시한 것들만을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타인은 각각 한 명의 ‘나’로써 이 세계를 살아간다. ‘나’ 또한 모두의 타인이며 ‘타인’은 모두 각각의 나이다.


누군가의 몸이 담겨있던 옷가지들, 항상 지나는 그 길에 옷 더미가 흩어져있는 상황들, 스타킹의 반복적 출연은 어느새 그것이 단순히 스타킹이 아닌 어떤 대상물, 혹은 피부로 느껴지게 한다. 사람의 껍데기 같아 보이는 옷가지들은 이내 몸이 어디로 갔는지에 대한 의문을 만들어내고 껍질로 여겨지던 천 조각들은 그것들이 몸인 듯 계속해서 흔적처럼, 실제처럼 남겨지고 내가 지나온 길에 생긴 누군가의 흔적, 내가 남기고 간 어떤 흔적, 어떤 인물을 떠올리게 하는 많은 표면적 단서들은 타인의 삶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되는 작은 통로가 된다.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