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은의 <Blooming>展: 이편과 저편의 미적 긴장에 관하여

2023

 

 

    당신이 이영은의 전시장 안에 들어서서 지금 작업을 둘러보고 있다면, 이 전시를 조금은 낯설게 느낄지도 모르겠다.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이 이유를 추적하다 보면 그의 작업의 정체를 이해하게 되며, 또 그의 작업의 미적 가치와 의미에 접근할 수 있다. 이 이유는 사실 겉보기에 그럴 뿐인 경우도 있고, 더 복잡 미묘한 경우도 있으니 차근차근 풀어가는 것이 좋겠다. 

    가장 쉬운 쪽에서 접근해보자.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의 단순한 물음에 관한 것이다. 얼핏 그의 작업엔 보통의 작업에서 보이는 특정한 대상이나 일관된 사물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작가는 돌멩이를, 또 다른 작가는 도자기를, 다른 경우엔 도시나 건물, 동물이나 인물을 일관되게 그린다. 그래서 그 특정 소재나 대상이 그 작가의 정체성이 된다. 무슨 무슨 작가. 이영은의 작업엔 그런 것이 없다. 그런 것을 그리지 않았다. 그림 안에서 인지되는 전망대, 컨퍼런스, 분수대, 자동차 공간 사이에 어떤 일관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가 그리고 있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상황이나 정황, 장면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전망대라는 대상이 아니라, 특정 시점에서 보이는 ‘전망대 안 공간(장면)’, ‘전망대에서 경치를 조망하는 인물들(상황)’, ‘망원경으로 경치를 보고 있구나(정황)’ 등이다. 컨퍼런스나 분수대 장면 등도 마찬가지다. 그의 그림이 대체로 미들 샷의 씬을 갖는 이유다. 이영은은 이런 것을 그리고 있는가? 이 역시 아니다. 관련되어 있다고 했지 그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가 그리려는 것은 궁극적으로 이런 상황이나 장면에 동반하는, 혹은 그 속에서 볼 수 있는 어떤 현상이다. 이를테면, 전망대 작업에서는 장면이기도 하고 정황이기도 한, ‘그림자가 바닥에 드리워져 있구나’ 같은 현상이다. 작가의 입장에서는 그려 보이려는 것이 이 상황이나 장면 안에 있으니 그것들을 함께 그릴 수밖에 없다. 

    현상이라고 하면, 이제 장면과 상황이 아니라 특정한 현상이 눈에 들어온다.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밀도가 얻어질 때까지 그 현상에 주의를 집중하지 않았을 가능성 크다는 것이며, 화가가 진짜 그리려는 그림의 포인트로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 실망하지 않아도 된다. 작가가 우리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은 대놓고 우리 앞에 드러나는 것도 아니며, 작가 스스로 그것을 손쉽게 드러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작가의 기질이건 아니면 주제 자체가 본래 그런 것이건 말이다. 왜 작가가 특정한 현상들에 집중하는지, 왜 그런 현상인지는 쉽게 드러나지 않을 수 있지만, 현상 자체는 매우 뚜렷하게 보인다. 어마어마한 회화적 공을 들였고, 그 자체로 탁월해서 현상 자체만으로도 매혹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림자, 실루엣으로서 그림자, 이것이 이영은이 그리고 있는 현상이다. 그림자도 하나의 사물이지만, 그가 그리는 것은 사물로서 그림자가 아니라 현상으로서 그림자다. 그림자를 하나의 현상으로 간주할 때, 우리는 그 현상 앞에 다양한 입장을 가진다. 칸트처럼 물자체를 지워버리고 우리를 현상에 한정할 수도 있고, 실재론적 입장이라면 즉각 현상과 실재의 관계를 떠올린다. 설사 현상학적 관점이라고 해도 그 현상은 사물 자체, 혹은 사물의 본질로 다가가기 위한 통로가 된다. 한편, 그가 그리는 그림자 현상은 물리적인 원인에서 비롯되기에 지표적이지만, 비물질적이고, 언제든 표면을 뒤덮고 교체해버린다는 점에서 현상들 중에서도 특이하다. 전망대 작업, <Blue Hour>(2022-3)에서 상단이 보통의 현상의 영역이고, 하단이 그림자의 영역이다. 이는 그림자를 일반 현상과 달리 하나의 특이현상으로 취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영은에게 이 현상은 더 특별해 보이는데, 전망대도 그렇고 컨퍼런스 장면도 그렇고 그 그림자는 마치 사물과 한 몸이 되어 있는 것 같은, 마치 그림자가 사물을 침식해버린 것처럼 그려져 있다. 사물의 표면인지 그림자인지 이 둘은 완전히 밀착해 있어 구분할 수 없다. <Blooming Lights>(2022-3)을 보라. 벽의 표면, 그림자, 그리고 빛이 완전히 뒤엉킨 화면은 심지어 벽 자체가 됐다. 그림자나 현상을 이런 식으로 다루는 태도는 그림자를 하나의 환영을 볼 수 있다면 환영을 실재의 구성 요소로 보려는, 지젝Zizek의 통찰을, 혹은 현상 안에서 객체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후설의 태도를 엿보게 한다. 그림자를 환영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고, 기존 작업들에서 여러 방식으로 객체성을 탐구해왔던 전력을 고려하면 그는 후설의 철학적 직관과 사고를 공유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이 특이한 그림자에 지극한 에너지를 투입한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그가 무엇을 그리려고 하는지 알 수 있다. 힘을 주는 것에 포인트가 있다. 그림 안에서 일반적 현상이나 이미지와 이 그림자 이미지의 영역을 비교해 보라. 사람이나 사물 등 일반 현상은 그림자의 영역과 비교해 퀄리티가 너무 떨어져 보이지 않도록 하는 정도에 멈춰 있으며, 그림자 영역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기교와 감각이 동원돼 그가 원하는 미적 효과가 연출된다. 여기서 미적 효과라는 것은 어떤 이미지나 성질이 직서적literal인 것에 그치지 않고, 감각적 영역과 다른 어떤 것의 균열 현상을 의미한다. 흔히 표면과 깊이의 균열, 표면과 이면alteriority이나 너머의 것의 분리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깊이 있는 표면이고, 표면 안에 이면이다. 말이 균열이라는 것이지, 실상은 우리에게 보이고 감각되는 것은 반대다. 현상과 이면의 것은 현상에 붙어 있고 함께 보인다. 그것은 ‘동시에 같이 보기’라는 점에서 월하임Richard Wollheim이 말한 ‘안에서 보기seeing-in’과 닮아 있다. 우리가 하나의 현상을 단순한 현상이 아닌 것으로 감각하는 순간 이미 균열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니, <Blooming Lights>에서 그림자가 그림자 이상으로 보이는 것 자체가 이미 균열이다. 회의장 벽면, 그림자와 빛의 기묘한 얽힘, 공간 전체에 퍼지는 공기감의 분위기가 하나의 이미지로 뒤엉켜 있다. 그윽하지만, 여러 레이어가 겹쳐진 듯한 이미지 효과는 벽에 그림자와 빛이 이중으로 덧씌워질 때 나타나는 효과다. 

    이제야 그가 무엇을 그렸는지,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는지, 그가 무엇에 끌리는지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것은 일부 답이 됐다. 마지막 질문은 바로 그가 가진 문제와 관련 있다. 그는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라 특이한 그림자 현상에 끌린다. 화가에게 궁극적인 물음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그가 이 현상들에서 쫓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이며, 다른 하나는 도대체 그것을 어떻게 회화적, 시각적 수단을 통해 말하고 드러내고, 다른 이들도 감지할 수 있게 연출할 수 있는지이다. 두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현상이 한낱 현상은 아니게 되는 지점이다. 이영은에게 그림자는 그림자를 만들어 낸 어떤 대상을 간접적으로 가리킨다는 점에서 일차적인 미적 매혹의 대상이 된다. 그림자는 그 자체로 다른 무엇인가를 증거하는 지표다. 그림자는 저편의 것을 이편으로 재현하지만, 물질도 제거하고, 세부의 내용도 제거하며, 비물질적 윤곽만으로 저편을 암시한다. 그림자는 저편과 밀접하게 관계하지만, 저편의 일부만 드러낸다. 이것은 이편과 저편의 존재론적, 동시에 인식론적이기 구조다.. 

    이런 방식은 후설의 ‘압샤퉁(abschattung, adumbration)’ 개념, 즉 그늘짓기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사물들의 무한한 성질과 퍼스펙티브를 경험한다. 하나의 사과를 보라. 가깝고 먼 정도에 따라, 방향에 따라 사과는 무한하게 달리 나타난다. 이때 우리의 의식은 한번에 하나의 퍼스펙티브밖에 경험할 수밖에 없기에 각각의 퍼스펙티브는 다른 퍼스펙티브에 그늘을 드리운다. 이것이 얍샤퉁, 음영이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변화하며 명멸하는 성질들과 부분들의 세계에 산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사물들을 경험하는 한 측면일 뿐이다. 후설에 따르면, 우리의 의식은 항상 지향적 객체를 의식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의 지향적 객체로서 통일된 사과를 의식하고 경험한다는 것이다. 즉, 부분과 변화하는 성질로서 압샤퉁은 사과라는 통일된 객체 아래서 경험된다. 사물들은 통일된 객체로서 사과 안에서 변화하는 부분과 성질들로 경험된다. 반대로 말해, 우리는 압샤퉁, 음영들 속에서 그 그늘이 드리워진 객체를 동시에 본다. 그늘을 통해, 그늘 아래에서, 그늘의 이면을 본다. 

    여기까지 이르면, 이영은이 그리는 것이 현상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며, 결국 어떤 구조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이 구조는 현상과 실재, 이편과 저편,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 등의 방식으로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고 체계화하는 방식이기도 하며, 또 세계나 사물이 본래 그렇게 생겨 먹었다는 의미에서 사물과 실재의 구조이기도 하다. 결론적이지만, 그가 이 구조의 특정한 작동 방식이나 관계성으로서 미적 경험의 현상에 매혹되고 그것을 그만의 방식으로 포착하고 사유하는 방식이 바로 그의 그림이다. 현상을 보지만 현상 이면의 것이 현상 안에서, 현상을 통해 피어나며blooming, 이편의 것에서 저편이 어른거리며, 지금 현실화된 것들에는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것들의 생기가 꿈틀거린다. 이영은에게 그림자는 미적 경험의 대상이지만, 궁극적으로 매혹되는 것은 이 구조이다. 그림자는 구조적 은유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그의 다른 그림들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림자가 없는 그림. 화가가 가장 공을 들인 것처럼 보이는 분수대 그림, 시리즈로 되어 있는 자동차 백미러 장면과 우산을 쓴 여인 작업이 그것들이다. 이 작업에는 그림자가 없거나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지만, 작가가 매혹되는 경험의 구조에서는 그림자 작업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분수대 작업, <Simultaneous Space>(2022)은 동시적 공간이라는 제목이 스스로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려준다. 이 그림에서 우리의 시선은 전경과 배경의 관점에서 크게 세 영역으로 분할된다. 관엽식물군의 전경, 분수대와 물방울의 중경, 사람들과 고전 양식의 기둥과 건물의 후경이 그것이다. 여기서 공간의 동시성이란 이들 공간의 동시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시공간에 살고 있는 배경 인물들의 동시성까지 의미한다. 내게 더 유의미하게 보이는 것은 전경, 중경, 후경의 분할과 그 동시성이다. 이 분할은 공간의 분할이기도 하지만, 사실 우리의 주의의 분할이다. 우리가 그런 식으로 나누어 보게 된다는 말이다. 이 중에서도 압도적인 장소는 분수대와 떨어지는 물방울이다. 마치 대리석을 직접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오는 분수대 형상은 우리의 시선을 잡아둘 만큼 황홀한 텍스쳐가 두드러진다. 이것이 바로 작업의 요체가 아닌지라고 생각하게 할 정도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것이 핵심은 아니다. 오히려 이 공간을 통해 보이는 배경, 이 동시적 관계가 진짜다. 그래서 이는 공간의 동시성이면서 동시에 이질적 시간의 동시성, 이시성異時性이다. 이 이시성은 회화적 화면에서는 공간적으로 나타나기에 부리오가 말했던 시간의 공간화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두 작업이 하나의 시리즈로 이뤄진, 자동차 백미러와 우산 쓴 여인이 등장하는 작업도 이런 시간과 공간의 동시성에 매료되는 건 마찬가지다. 그는 현상과 실재,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 부분적인 성질과 통일된 객체가 분열하고 융합되는 긴장을 미적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똑같이 시간과 공간의 균열과 동시성을 같은 비중으로 다룬다. 분수대의 탁월한 질감만큼 우리의 눈을 끄는 것은 A 필러라 불리는 자동차의 프레임 부분이다. 이 자체로 회화적 맛이 훌륭하지만, 그것은 분수대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주의를 끌면서 동시에 우리를 자동차의 안과 밖으로 분할한다. 이런 분할에도 불구하고 백미러에 비친 여성 이미지는 외부를 다시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림자가 그랬던 것처럼 거울도 자신의 표면에 자신의 외부를 담는 역할을 한다. 차 안에서 살짝 보이는 여성은 다른 그림으로 이동했고, 그 여성은 한 그림 안에 존재하면서 다시 다른 그림 안에 등장해 역시 분리와 동시성을 실현한다. 이런 공간의 동시성이나 시간의 동시성은 우리 시대의 가상적 시간성과 맥을 같이 한다. 이런 현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미디어의 시각이다. 우리는 한 선수에 대한 다른 시점과 시간이 공존하는 스포츠 경기 중계에 더는 낯설어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은 하나의 큰 시공간 속에 통합된 것처럼 보이면서도 실상 각각의 상대적 시공간 속에 분열되어 있다. 

    앞의 그림자 작업과 이들 이시적 공간 작업은 구조적으로 읽힐 때만 하나의 맥락 안에서 정합적으로 보인다. 그 그림자 작업에서건 동시적 시공간 작업에서건 이편과 저편, 이 공간과 저 공간, 이 시간과 저 시간, 현상과 실재, 현실성과 잠재성의 균열과 융합의 긴장 안에 머문다. 하먼에 따르면, 바로 그 긴장이 미적 경험의 원천이다. 그림자 작업에서는 융합 속에서 분열하고, 이시적 공간 작업에서는 분열하면서 통합된다. 특히 그림자 작업의 경우, 이 현상과 실재,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이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존재론적 지위를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지, 더 나가면 우리의 존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어떤 것을 원하고 있는지에 관한 선택과 집중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는 이 구조에 대해 개념이나 논리로 사유하지 않는다. 그래야 할 이유도 없다. 반면, 이영은은 이를 감각적 현상 안에서 직관하며 그것을 연출된 시각적 현상으로 드러내려 한다. 이것이 본래 예술가의 일이다. 

    그의 작업엔 특정한 어휘나 문법, 기법, 구성, 뚜렷한 형식이나 스타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그림자라는 대상, 특정한 퍼스펙티브와 아카데믹한 화풍 정도가 있을 뿐이다. 화풍으로 보면 그는 텍스쳐에 탐닉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자 텍스쳐는 그의 문제와 꽤 잘 어울렸다. 그러나 아직은 그 화풍도 사실 작가 스스로는 자신의 스타일로 강하게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의 작업을 이끄는 동인, 그가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던 것은 사물과 세계를 보는 태도이자 그와 관련된 문제이지 위의 회화 언어적인 요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들은 후자를 통해서 전자에 접근하는 것이 보통이고, 그것이 예술의 미덕이며, 그에게도 곧 이 둘이 하나로 통일되는 때가 있겠지만, 현재까지 그에게 중요한 것은 문제적 현상, 그 미적 경험으로 보인다. 아마 그는 머지않아 자신의 언어와 스타일 속에 이 문제를 통합해낼 것이다. 문제와 물음, 그가 가진 솜씨들이 완전히 정합적으로 개화할 때 그때가 이영은의 회화가 오롯이 완성되는 때일 것이다.

 

                             조경진(미술비평, 연세대학교 인문학 연구원 연구교수)

     세상과의 접촉면으로부터 / 채영

     2018

옷이다. 누군가 한쪽에 벗어 놓은 혹은 그저 내려놓은 옷들이 섞여 있는 장면이다. 마구잡이로 헝클어져있는 모습은 아니다. 적당하게 서로가 닿아있고 섞여있다. 옷의 일부가 확대되어 화면을 가득 메우기도 하고 옷들이 놓여있는 장소가 드러나기도 한다. 사실적으로 그려진 옷을 본 관객은 아마도 사람의 흔적을 찾게 된다. 누가 내려놓았는지 혹은 벗어 놓았는지, 그리고 누구의 옷인지 궁금해진다.


이영은의 회화에서 옷은 먼저 기호로서 해석된다. 지표이자 상징으로서 옷은 부재하는 주인을 가리키고 동시에 그 소유자의 성, 나이, 직업이나 국적, 종교, 사회적 위치와 계급 따위를 연상시킨다. 미술사에서 옷은 초상화 속 인물을 해석하는 기호로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종교화나 역사화 등에서도 당시의 사회문화적 맥락에 따른 도상으로 해석되어 왔다. 동시대의 시각 이미지에서도 옷은 찢기거나 태워짐으로써 의사 전달의 수단이 되기도 하고 문양이나 재질에 따라 혹은 제조업체에 따라서도 그 종교적, 역사적 의미들이 부여되기도 한다.


옷의 종류와 놓인 형태, 천의 색이나 질감 등은 그림 속 대상을 모사된 ‘실제적인 것들에 대한 기호’로서 해석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내 옷의 소유자들을 소환하려 시도한다. 관객은 옷의 주인이 누구인지 특정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간단한 추측들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내 해석은 일정한 틀을 넘지 못한다. 이영은의 회화 속에서 옷은 인체를 덮었던 껍질로서 그 대상을 불러들이지만 그 추측들이 끝나고 나면 마치 표상체로서의 기능을 다 한 듯 그대로 화면에 정지되어 있다.


이는 여전히 옷이 주인을 가리키는 지표로서 작동하지만 회화 내의 이야기들은 최소화되었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전 작업들이 연출된 장면, 즉 공간성이 드러나는 배경 위에 신체가 사라지고 남은 옷들의 사건처럼 보였다면 이번 전시의 신작들은 주로 옷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덕분에 화면의 연출을 통해 전달되던 메시지들은 이제 관람자의 해석의 영역으로 나아간다. 사라져버린 신체, 옷들이 놓인 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사라지고 주인 없이 놓인 옷에 대한 표면이 전시된다.


다른 대상들을 제거함으로써, 옷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기호로 제시되기보다는 인체를 덮은 외형으로서의 특징이 부각된다. 회화 속 옷들은 무질서하게 놓여있는 듯도 보이지만 일정한 옷의 형상과 구도는 옷이 덮었을 신체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옷들의 접촉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드러낸다. 내면의 교류와 소통을 꿈꾸지만 마치 옷처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혹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낸 껍질은 인간과 외부세계 사이에 경계면을 만든다.


작가는 이러한 옷의 특성을 통해 사람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듯 보인다. 그려진 옷들은 사람이 스스로를 감추고 내보이는 방식, 즉 우리가 외부와 관계를 맺는 방식을 드러낸다. 외면의 껍질들이 그 대상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는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또한 껍질을 포장한다. 결국 이렇게 만들어진 껍질은 외부세계와 만나는 시작점이 되지만 결국 진실은 흐려지고 소통의 불가능성을 이미 내재하게 된다.


이전의 「Hug」 연작들처럼 마치 안겨 있는 듯 하거나 사람의 동작을 연상시키는 연출은 생략되었지만 오히려 군집과 같은 구도나 밀착되어 있는 형태는 대상의 접촉 정도를 더 강하게 보여준다. 이 접촉의 순간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들이다. 가족, 친구, 연인과의 접촉이나 스쳐지나가는 군중들과의 직접적인 접촉 뿐 아니라 이제는 카메라에 담겨 온라인을 통해 사람들과 접촉한다. 관계, 즉 외부와의 접촉 경로는 수없이 많아졌지만 그 순간들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즉 여전히 우리가 보고/보이고 있는 것은, 우리가 만나고 헤어지며 만들어간 관계들은 그저 옷과 같은 껍질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문들이 작가의 회화를 이룬다. 이영은의 회화는 옷을 통해서 의미들을 전달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유일하게 만날 수 있는 세계의 모습은 그저 옷과 같은 표면의 대상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그 대상들의 세계와 자신과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한 회화적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작가는 외부세계와 맺는 관계의 매개체로 기능하는 옷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가시화하기 위해 대상으로서 옷을, 방법으로서 회화를 선택한 것이다.  


그 외부세계의 경계면에 대한 작가의 태도, 즉 본질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통해 관계를 드러내려는 태도는 겹쳐있는 천들의 표면과 그 주름 그리고 그림자에서 찾을 수 있다. 표면에 불과할 대상들을 회화에 옮겨놓는 시도들이 천의 주름과 그림자로 관객 앞에 제시된다. 회화 앞에 선 관객은 그림 속 옷에 대하여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각자의 기억들을 소환한다. 각자의 방식으로 선택한 해석의 과정 속에 이영은의 회화가 갖는 의미가 있다. 그 해석의 순간들, 그 기억의 과정이야말로 작가가 옷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사람과 외부세계를 연결하는 관계의 과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From the Surface in Contact with the World / Young Chae

There are clothes, a scene of clothes in which someone has taken off or placed down, all jumbled together. However, they are not indiscriminately tangled, but rather carefully arranged and touching each other. Some parts of the clothes are magnified to fill the canvas, and other parts show where they are located. Looking at these realistic depictions of the clothing, the audience might seek for the traces of the people who have taken them off, put them down, or once possessed them.


In Young-eun Lee’s paintings, these clothes are above all interpreted as signs. Functioning as signs and symbols, the clothing indicates all at once its absent owners, their gender, age, occupation, nationality, religion, social status and class. Throughout art history, clothing has been used as a symbol for interpreting figures in portraits, as well as icons in religious or historical paintings, implying a social and cultural context. In the contemporary visual lexicon, clothing can be employed as means of communication, for example when it is burnt or torn it can have particular signification, and depending on pattern, material or brand, it can also be imbued with religious or historical significance.   


The kinds of clothes and the way they are positioned, as well as the colors and textures of the fabric allow us to interpret the objects depicted in the painting as 'signs of the real’, and then subsequently conjuring the owners of these items. The audience cannot identify the owner of the clothing itself, yet they can begin to make simple assumptions. However, their interpretations are limited. In Lee’s paintings, the clothes are skins that once covered human bodies. They recall their owners but still remain inside the picture plane even after these assumptions are all made, as if their roles as signifiers have merely vanished. 


This is because the clothing still functions as an index of their owners while at the same time possessing a minimal narrative. Lee’s new paintings are filled with images of clothes, while her previous works seemed more like staged scenes, where the viewer witnessed the happenings of clothes in spaces without human bodies. Therefore, the message is interpreted by the audience rather than being conveyed through the composition of the scenery. We can no longer draw narratives from the vanished bodies or from the spaces where these clothes are located, but from the surface of the clothes that are displayed without their owners. 


In the removal of all other objects, clothing is proposed as being a bare signifier, while their external features—that it covers a human body—are emphasized. The clothes in the paintings may appear chaotic, yet their form and composition are reminiscent of the bodies that once they draped. The contact between the clothes reveal relationships between people. Although we dream of exchanging and communicating our inner sides, these skins—clothes that were created as a means for protection and expression of self—build boundaries between humans and the outside world. 



Through these features of clothing the artist seems to illustrate the relationships between people. The depicted clothes disclose the way people hide and express themselves. In other words, how we engage the outside world. We understand that the external skin cannot fully express the object, yet we take it as a standard for value judgments, while trying hard to glamorize it. In the end, this skin becomes the entry point to the outside world, but it embeds the impossibilities of communication, while the truth becomes opaque.


When compared to Lee’s previous series Hug, the new works do not portray figures that are, for example, engaged in human gestures like hugging. However, through the swarm-like composition or tightly-jammed forms of clothing they present a stronger sense of contact. These particular moments of contact are what we experience in our daily lives. We not only have direct contact with families, friends, lovers, or passersby but also encounter people on the internet who are captured through the camera. We have more relationships, or more precisely, a greater quantity of methods of coming into contact with the outside world, but this begs the question of the moment of this contact. What we see or how we are seen, and the relationships we form while meeting and parting with people, may all become mere surface, like the clothes.


The above stated questions constitute Lee’s paintings. The aim of her paintings is not to convey the meaning of the depicted clothes. Rather, Lee continues her attempts to express the idea, that the only way one has access to the world is through external objects like clothes. Furthermore, she wishes to express the relationships between the world of these objects and herself. The artist chooses the object of clothing in order to visualize its relationship to the outside world, rather than exploring its function as a medium through the means of painting. Rather than exploring it as a medium for this relationship, the artist chooses clothing and the means of paint to visualize relationships to the outside world.


Observing the surface of the overlapped fabrics, their wrinkles and the shadows in the paintings, we can see the artist’s attitude towards the boundary of outside world, which aims to expose the relationships through borders instead of delving into the idea of essence. The artist transfers the objects into her painting in the forms of wrinkles and shadows of the fabric, that would otherwise remain as mere surfaces. The audience makes personal interpretations of the clothes in the paintings, recalling their own memories. The meanings of Lee’s paintings lie in the process of various interpretations because the moments of interpretation and the process of remembering are the procedures of relationships themselves connecting people to outside world, which Lee aims to convey through the concept of the clothes.